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해군 (문단 편집) == 상세 == 최고통수권자는 육군과 마찬가지로 [[천황]]이었으며 내각에는 권한이 없었다. 그 아래로는 [[군정권]]은 해군대신, [[군령권]]은 군령부총장[* 해군 참모총장에 해당한다. 일본 육군이 주도하던 참모본부에서 해군이 떨어져나온 이후 "군령부"라는 독자적인 명칭을 사용했다.], 실전부대 지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담당하는 일종의 [[과두제]] 구조였다. 1930년대 당시 셋의 위상은 복잡했다. 해군대신이 명목상 서열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군령부총장 재임시기 [[군정권]]에 해당하는 '''병력량 결정권'''을 군령부로 가져온 이래 해군성은 예산 셔틀로 전락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같은 스타급 인사가 연합함대를 틀어쥐고 있을 경우는 역시 상급자인 해군대신, 군령부총장도 통제를 못 했다. 다만 역시 세 군데 중 가장 권력이 강한 곳은 군령권을 가진 군령부였다. 군령부 제 1과 작전과의 10명 남짓되는 참모들이 200만 제국 해군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이런 기형적 체제는 대전 말기 연합함대 전력이 거덜나면서 군령부의 발언력이 약화되고, 내각총리대신과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경험해본 마지막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제독]]이 군령부총장 [[도요다 소에무]] 제독을 '''[[짬]]으로''' 누를 수 있게 되고서야 수습되었다. 전시에는 육군과 [[대본영]]을 설치했다. 프로이센 육군을 모방한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을 모방했다.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제해권]]을 중시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잘 알려져있듯 육군과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미국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합동작전을 실시했지만 일본 육해군이 합동전투를 한 것은 [[과달카날]],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레이테 만 해전]]뿐이었다. 인원은 해군이 훨씬 적어서 육군보다 복지가 좋았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육군에서 많이 느꼈다. 거기다 해군은 말단 [[수병]]들도 근무 여건이 [[병사]]에 비해 좋고 기술도 배울 수 있어 입대경쟁이 치열했다. 육군에서는 일부 [[공병]], [[운전병]], [[통신병]], [[항공병]] 같은 기술 특기가 아닌 이상에야 입대부터 전역까지 [[소총]] 한 자루만 닦으며 구르기가 일상이었다. 그에 반해 대부분 해군은 어마어마한 기관부 혹은 그에 준하는 기계장치들을 다루는 것이 일이며, 해군에서 막일꾼으로 취급받는 [[갑판병]]조차 [[페인트]] 도색 등 [[선박]] 유지/보수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이는 전역시 민간에서도 꽤 쓸모 있는 것들이었다. 남들이 육군에서 구를 때 해군으로 들어온다면 공짜로 기술을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사회 그리고 현재 21세기의 중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징집병일 때 배워온 운전, 정비, 항해 등의 기술로 평생을 먹고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메리트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전부 이러한 인식이 있는 만큼 경쟁률은 어마어마해 대거 주로 엘리트~준엘리트들이 뽑혀가는 경향이 강했고, 육군 병사들이 심상소학교도 겨우 마친 이들이 득시글거릴 때 해군 수병들은 못해도 고등소학교는 나와야 들어갈 수 있었고, 당시 기준으론 꽤 고학력인 중졸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이는 해군의 선민의식과 귀족화에 한몫을 했다. 대신 국내 정치에서 입김이 강한 것은 육군이었으니 해군도 아쉬운게 있기는 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군계 수장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1898년 '''원수육군대장'''으로 계급승진)가 바로 육군출신, 여기다가 초창기 조슈번 출신들이 육군을, 사쓰마번 출신들이 해군을 구성하는 데 중심축이 되었는데, 세이난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사쓰마번 계열들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더하여서 야마가타 이외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모두 조슈번 출신이였다.] 전통적으로 일본 육군은 [[러시아 제국]] 및 후계자인 [[소비에트 연방]]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지만, 해군은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다. 출신 학교와 학교에서의 성적을 따지는 철저한 학력 절대주의 집단이었으며, 해군의 특성상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서양인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 해군 장교들에게는 [[영어]] 등 외국어 교육을 포함해 상당한 수준으로 [[교양]]을 가르쳤던 것이 특징이다. 그 덕분에 해군의 장교들은 사회 상류층 이상으로 교양을 쌓은 이들이 일반적이었고, 일본 제국 신민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는 해군 내부의 파벌다툼으로 인해 인사 정책이 우왕좌왕할 가능성을 막을 객관적 인사 기준이 학교 성적뿐이었기 때문이고, 육군에 비해 수가 적었기에 1인당 교육비를 더 많이 지출할 수 있었던 덕도 있었다. 이런 해군 특유의 귀족주의 현상은 일본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1인당 소득은 다소 처지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해군에 투자를 좀 한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쪽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비록 병과사관에 비해 무시되는 면이 없지 않았으나, 비병과사관들인 [[주계|주계과]][* 재정, 회계를 당시 일본에선 주계라고 불렀다.], 군의과, 기술과, 법무과 등으로 임관하는 2년제 단기사관 대우가 육군 동 병과 대비 매우 좋았다. 병과가 아니면 장교 취급도 못 받았다 같은 건 사병들의 뒷담화 내지는 지휘 계통에서의 배제 등이었지, 일단 자기 계급에 맞는 의전은 확실히 받았고 전투 쪽으로는 무시당했을지언정 그들의 특기인 전문 분야 쪽으로는 병과사관들도 비병과사관들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아예 병과사관들과는 반쯤 별세계 사람처럼 여기며 지내는 편이라, 한두 계급 정도면 병과와 비병과사관들끼리 상호 존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현 대한민국 국군도 직속상관이거나 장성이 아닌 이상 군법무관이나 군의관, 군종목사 등 특수병과 장교들에겐 일반적으로 상호존대를 하지만, 일본 해군에선 아예 기술행정직 장교들과도 그렇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대 출신 고학력자나 정치 및 경제계의 유명 인사의 자제 등이 해군으로 몰리는 효과도 있었고, 이들이 전후 일본의 정계 및 제계에 대거 진출하며 해군을 좋게 평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선민사상|삐딱한 엘리트 의식]]을 낳아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체계가 갖춰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군내부에서의 지위와 대우는 오로지 학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실제 능력은 그 다음 문제였다. 또한 장교들이 엘리트 의식에 빠진 탓에 사병들은 장교가 될 수 없었다. 경력이 오래되고 능력 있는 사병들을 그대로 수병, 하사관에서 썩게 만드는 것은 전력손실이라는 이유로 제도가 개편되긴 했는데, 그렇게 생긴 것이 특무사관이라는 특별 계급이다. 하사관에서 능력 있는 인물들을 특무사관으로 진급시켜 특무소위~대위로 임관하여 장교 취급을 해주긴 했는데,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었다. 계급장부터가 한 눈에 봐도 일반 위관급 사관과는 구분되도록 디자인 했고, 아직 부임조차 하지 않은 [[일본해군병학교]]를 갓 졸업한 견습사관의 지휘권이 특무대위보다 위에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교들로부터도 같은 급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차라리 [[준위|병조장]]으로 남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하사관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수병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했고, 장교 계급 외의 군기는 상당히 막장이었다.[* 반면 육군에서는 학력과 성적은 일절 관계 없이 모두가 똑같이 개 같은 취급을 받았다. 장교들은 출신학교에 따라 인맥을 타느라 계급에 영향이 있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능력이 중시되었고, 하사관들도 장교 진급이 가능했다. 또 이렇게 진급한 하사관들은 장교들과 계급상 규정된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비육사라고 암암리에 무시되는 건 장교들 사이에서 마찬가지긴 했다. 게다가, 비전투병과 장교의 질과 대우는 해군이 앞서 언급한 이유로 훨씬 좋았다.] 결국 1942년에 기존 특무사관들을 전부 일반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 사병 출신들이 사관이 될 수 있는 길을 아예 막았다. 소좌로의 진급도 특무사관 출신들은 거의 막혀 있어서 해체시까지 특무 출신 소좌는 불과 수십 명, 중좌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고 대좌와 [[제독]]은 한 명도 없었다. 특무 출신 신규 좌관급 사관이 한 명이라도 나오면 전 해군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다만, 특무사관이 소좌가 되면 일반사관으로 편입돼 특무소좌가 아닌 소좌 계급이 되어 특무 시절과 달리 엄연히 대위보다 선임자였고, 소좌들과 마찬가지로 덴노로부터 [[군도]]도 하사받았다. 또한 이렇게 바늘구멍 수준의 진입 장벽 탓에 의외로 특무 출신 좌관급들은 [[근성|"특무 출신인데도 소좌를 달 정도면 인정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진급에 대해 불이익은 있을지언정 주변으로부터 다른 의미로 존경과 대우는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보급의 중요성 자체는 이들도 알고는 있었고 잘 갖춰진 기지에서의 보급은 일본의 경제사정에 비해서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 사실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병참 능력은 진보하는 축이었다. 당장 해외시장에서 사오거나 영미의 지원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야 했던 러일전쟁 즈음과 달리 어지간한 장비는 훨씬 대규모로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보급의 범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넓어졌다.][* 사실 말 그대로 원론적 관점에서 보급을 무시하는 나라는 거의 찾기 어렵다. 오늘날 북한조차도 일반인들에 비해 군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의복이나 식량 등의 지원을 해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니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군인들은 소속국의 일반적인 국민들에 비해 대부분 실제로 잘 먹었고 또 잘 먹어야 했다. 문제는 그러한 보급을 적시적소에 수행하는 노하우다.] 하지만 그것도 영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었고, 당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때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은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서 나치독일의 동맹으로서 기여는 영미보다 미미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과는 달리 상당히 활약했는데 태평양 전쟁 초반까지는 미 해군과 그럭저럭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다. 실제로 개전시 일본 해군의 전력은 영국과 미국에 이은 3위였다.[* 런던 해군 군축조약 등을 거치고도 태평양 개전 1년 전인 1940년 6월 기준으로 항공모함 8척, 전함 10척, 순양함 47척, 구축함 134척,잠수함 66척을 보유했다.] 전쟁 초반에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전함 상당수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면서 잠시 동안 미국보다 전력이 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전략적 능력의 부재, 국력의 차이 등 이유로 미국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따지고 보면 해군 하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상대적 후진성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